어쩌다 보니 '그'가 많네
햇살이 너그럽길래 베란다에 방석 깔고 앉아서
고추 꼭지를 따기 시작했는데
그 햇살의 너그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어두워지더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더라고~
우와 눈이다~소복소복 내린다는 말이 딱 맞는
커다란 함박눈이 내리더라고.
창밖에 쏟아지는 눈이 낯설은지 만 5년을 다 살고 있는
우리 집 멍뭉이는 멍멍 거린다.
반가움에 환호하는 건지
낯섦에 경계하는 건지..
퐁퐁 쏟아져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지면에
짙은 물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렇게 조금만 더 내리면 쌓일 것 같더니
퐁퐁 쏟아지던 눈도 오늘 햇살 같아서 금세
그쳤다.
어디는 눈이 많이 온다는데 거기가 어딘지 궁금할 지경이다.
오늘
실비보험 청구를 하러 갔다.
창구에서 보험청구를 하면서 서류 작성을 하는데
필요해서 진단서며 진료비 상세 내역서 병원비 영수증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처음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가 몇 년 전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말이다.
그때 남편은 나 병원에 내려주고 일 보러 가고..
나는 검사에 검사를 하고 이러쿵저러쿵 의사의 말을 듣고
아마 진료의뢰서를 한장 받아 들고 나오면서....
차도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바람을 가르는 차들 소리 밖에..
그 소리들에 갇혀버린 나..
그땐 무감각했었다. 아니 멍했다고 해야 맞을지도..
그렇게 더 큰 병원을 몇~달을 다녔던 것 같다.
그래봤지만 별 차도 없었고
그렇게 익숙해져 갔는지
그냥저냥 괜찮아져 갔는지
그럭저럭 몇 년.. 잊은듯 잊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안고 살았다.
그러니 실비 청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을 텐데 남편이 했었던 모양이다.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다. 내 상태가..
그냥 만성화되는 거 같다는 말을 들었을 뿐...
그런데 오늘 진단명, 질병코드 뭐 그런 거 보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글자로 새겨긴 걸 내 눈으로 보니
그렇구나 싶은 것이
그 느낌이 참 많이 다르더라고..
그래서..
그랬나 봐.
그냥 기분이 좀 우울했어.
그때 겁먹었던 것보다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좀 오늘은 우울했어.
그래 그냥 그랬어.
그렇지만 그냥 이런 기분은 오늘까지만...
그렇잖아. 지금 이 나이쯤이면 지병 하나쯤 없는 사람 드물잖아.
그거에 비하면 나는 아주 양호한 거지..
그 실비 나오면 맛난 거나 실컷 사 먹어야지.
그 덕에 음식 한 번 더 조심하고, 카페인도 더 조심하고..스트레스에 도망 다니고...
그럼 되는 거지
그렇지.
그래.. 그럼 되는 거야..
그치
그냥 좀 우울한 날~ 오늘 저녁에도 영웅이 스페셜을 한다고 하니
그보다 더 좋은게 어딨겠어.
그거 보면서 이 기분 훌훌 털어버려야지 싶다.
그리고 푸욱 자고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러면서 나는 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잘 살아갈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