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날들/편안한 하루하루(2023)

나만의공간

그냥. . 2023. 12. 5. 15:35

오랜만에 쉬는 남편이 마악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뒤를 이어 우체부아저씨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온다.

청소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거실 창문을 슬그머니 닫으며

일찍 왔네 오늘도 춥지... 물으니 오늘은 안 추워 포근해 하며 리모컨을 집어 들던 남편이

오토바이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택배 올 것 있냐? 묻길래

어 택배 올 거 있어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며 현관 앞에 얌전히 놓여있는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뭐라 하지도 않는데 생필품이 아닌 것들의 택배가 오면 그냥 나도 모르게 남편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건

오랜 시집살이의 습관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삼십 년을 넘게 살았어도 이 집이 정이 가지 않았다어떡하면 벗어날 수 있을 까 어떡하면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좋은 기억보다 그렇지 못한 것들로 채워졌다고 단정 지었고 내 몸이 망가진 건 오로지 이 집 탓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집 탓이 어디있어내 탓이지 이 집에 적응 못한 것도요즘시대에 몸이 망가질 만큼 스트레스를 끌어안고 살았던 것도 내 탓이겠지만 나는 어떤 것에든 핑계를 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이래도 되나 싶을만치 혼자 비실 거리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작은 창이 있는 나만의 공간이 이 집안에 생길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다.

지난 봄 리모델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큰 아이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저 베란다 턱이며 화장실 턱 넘어 다니다가 엄마 삐그덕 하면 답 없어요.

저 턱들 모두 없애야 해요.. 라며 어지럼증으로 남들보다 조금 더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엄마를 걱정했던 것이다.

오래된 집이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거울처럼 받아들이는 집이 나는 그냥 조금은 더 따듯했으면 싶으면서

아이들 결혼 시키기 전에 고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있다가는 아들한테 평생 원망 듣겠다며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턱 높은 베란다나 화장실도 문제였지만 서향으로 있는 주방 쪽 베란다가 정말 대책 없었다.

여름에서 가을까지는 햇살이 점심때부터 저녁 해 질 때까지 제 집인 듯 들어 앉아 주인 노릇을 하고

겨울이면 응큼한 음지가 웅크리고 앉아 살림 차리는 곳이다 보니 출입은 잘 안 하게 되고 잡동사니만 쌓여가는 것이 

늘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래서 창을 모두 걷어 내고 벽을 세우고 작은 창문 하나 내어 다용도실로 만들어 달라 부탁했었다

그곳에 필요한 선반 설치하러 오셨던 날

창문 밑에 조그마한 선반 하나 질러 책상으로 쓸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말씀드렸더니

책상 놓아 드려요하길래

아니에요책상까지는 아니고 선반 하나 설치해서 창하고 가까워서 밖이 잘 내다 보였으면 좋겠어요했더니

남편이 뭐 하게하고 묻는 거다그래서

비도 보고 눈도 보고 꽃밭도 보고... 바람도 보고 하려고했다.

그렇게 창문 아래 선반 하나 설치했을 뿐인데 너무 좋았다 딱 노트북 쓰기 좋은 크기이니 밖이 바로 내다 보였고,

빗소리도 바람 소리도 하늘도 더 가까이 보고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다만 나는 가끔 여기 앉아 창밖이나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네모 반듯한 하얀 벽에 하얀 천장 적당한 크기의 창문 그리고 선반형 책상 거기에 깔끔하게 올라앉은 과하지 않은 선반들..

그래 다용도실 겸 내 방 해야지 싶어서..

어머니 물건으로 채워질까 싶어 서둘러 선반 위에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뜨개 실들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 몇 권과 일기장 몇 권 그리고 오십이 넘었어도 여전히 좋아라 하는 인형이랑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올려놓았다,

한쪽 벽이 다용도실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쌓여 있는 것들을 보고 남편이 그랬다.

니방 한다며 그럼 이런 것들은 다른 데로 빼야지~하며 던진 한마디로

옷걸이는 아이 방으로이런저런 것들은 다 흩어져 숨을 곳을 찾아 숨어 들어갔다.

그렇게 해 놓으니 이곳이 정말 내 방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집안 제일 안쪽 보일러도 들어가지 않고 에어컨도 없어서 계절을 그대로 반영하는 나만의 창가 작은 책상이 있는 방..

창밖으로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면 그 소리 들으며 뜨개질을 하고

가을 낙엽이 날리면 괜히 새침해져서는 뜨개질하던 손도 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겨울 스산한 꽃밭은 또 가끔 피는 눈꽃으로 달래면서 옆집 담장을 넘나드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작은아이가 첫 월급 탔다며 보내 준 용돈으로 난로 하나랑 작은 탁상용 트리 하나 들여놓고는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하니 뭐가 그리 좋으냐는 남편..

좋지나 트리가 얼마나 놓고 싶었는지 알아어른들 성화 신경 쓰느라 생각도 안 하고 살았는데 오십도 꺾이였는데 나이에 이게 무슨 일이래하며 너스레를 떠는 내게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젊어서 그렇게 살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한다.

아녀아녀 지금도 늦지 않았어얼마나 좋은지 몰라 

이게 그때그때 뭐든하고 살았으면 이렇게 좋은 줄 알았겠어안 그래하며 웃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주문했던 한뼘크기의 불멍 난로가 택배로 온 것이다.

멍 참 좋아한다.

불 멍 꽃 멍 햇살 멍 

세상의 멍이란 멍을 좋아하는 내게 나만의 이 창가 작은책상이 있는 공간은 요령 모르고 살아서

멍 많고 흉 많은 내게 더 없는 쉼이며 숨을 곳이며치유의 공간이 되었다.

너무 좋다삼십여 년 만에 이 집이 좋아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내 방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만의 창가 작은 책상이 있는 이곳 여기가 나는 너무 좋다.

마치 나만 알고 있는 내 마음속 저 깊은 속내 같은 나만의 이곳에서 나는 날마다

일기도 쓰고 뜨개질도 하고 창밖도 내다보면서 나만의 감성에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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