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날들/2020 145

커피한잔

뜨거운 커피 한잔 놓고 앉아 있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창문을 열어재끼고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시다. 양손으로 살짝 안아 잡은 커피가 찰랑이는 잔은 더없이 따듯하고, 운동장 만큼 넓은 침대를 독차지하고 골골 거리며 잠들어 있는 국수의 모습은 더없이 평화롭다. 조금 있으면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돌아 올 아들이 있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잠시 멈춤 하는 아들에게 더없는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세상 제일 한가로운 시간을 누리고 있는 작은 아이가 아직 한참 꿈나라일 시간에 나오길래 뭔 일이냐 물었더니 지난번에 본 기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그런다. 진짜? 합격율이 엄청 낮아서 기대도 안 한다며. 했더니 이번 시험부터 난이도가 조금 조정이 되었나 봐 하면서 하는 말이 시험 본 날 합격 할 줄 알았는데 괜..

연말

연말인데 연말 분위기가 하나도 없다. 시끄러운 세상 탓이기도 하겠지만 살아온 세월만큼 무뎌진 감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뭘 정리하고 뭘 새로 시작하고 그래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있기는 한데 뭘 해야 하는지 뭘 정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붕 위에 태양광을 좀 크게 설치하려고 상담받았다가 말았다. 남편은 다른 계산 법으로 말았겠지만 나는 또 나 나름의 계산으로 보채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었을 때는 동네에 하나 둘씩 지붕 위에 태양광이 생길 때마다 우리도 설치하면 좋겠단 생각을 했었는데 일반 가정룡보다 좀 크게 설치할까 하는 생각에 상담을 받았는데 알려진 것 만큼 공짜로 어쩌고 수익이 어쩌고 하는 것들이 과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만의 계산 법은.. 지금 지붕 위에 설치하면.. 집을 새로 짓기도..

눈 오리

엊저녁 일찌감치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 폰을 들어다 보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제 할일에 충실한 멍뭉이 큰아이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니 우리 형아 왔다. 엄마 형아 왔어. 형아~ 하듯 멍! 멍! 거린다. 이불속에서 정신줄만 살짝 붙들고 왔구나....했는데 들어오는 소리가 나지 않아서 혹시.. 했더니 역시였다. 짖어대는 멍뭉이 조용히 시킨다고 방에 들어온 아들에게 "눈 아직도 오냐? 하니 "아니 눈 그쳤어." '춥지" 하니 "아니 그렇게 많이 춥지는 않은데. 엄마 나 오리 만들었어. " 하며 사진을 톡으로 보내 준다. 그것이 저 위에 있는 눈오리 ..흐흐흐.. 이쁘고 귀엽다. 며칠 전.. "엄마 나 이거 살까?" "뭔데" "눈으로 오리 만드는 거." "뭘 그걸 사. 작년처럼 눈 한 번 오고 안 오면 뭐하게"..

눈오네

옆집 지붕 위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한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가로등 불빛 아래 지붕 위는 눈이 부실만큼 하얗다. 지금도 오나... 지금도 눈이 오고 있을까? 그쳤나... 몇 번을 나가 보고 내다 봤는지 모른다. 모르겠다. 눈 속을 걸을 마음도 없으면서 사실 눈 위를 걷기엔 골목엔 눈이 아직 아쉽고, 혼자 걷기엔 밤이 너무 깊었고, 국수 데리고 잠까 나갔다 오기는 했지만 눈보다는 젖은 부분이 너무 많아 아쉽다. 소복소복 쌓여서 내 발자국 국수 발자국 찍을 수 있었으면 이보다 더 깊었어도 이보다 더 추웠어도 이보다 더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도 나는 눈 밟으러 나갔을 거야. 그러기엔 눈이 너무 아쉬워. 아직 날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쉽다. 내일은 내일 아침 눈 떴을 때는 세상은 온통 눈이었으면 좋겠다. 내 발자국..

비가왔다

숨은 국수 찾기를 해야 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 늘 다니던 길이 지루했나 보다. 잘 따라오겠지 하고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 보니 옆길로 아니 옆 논으로 샜다. 지난 계절 동안 고생했던 땅을 뒤엎어 쉬게 해 놓은 저곳이 그렇게 걷고 싶었을까. 고난의 길인 줄도 모르고.. 다리도 짧고, 몸도 작은 저 아이가 걷기에는 갈아 놓은 논은 골도 깊고, 울퉁불통도 심하다. 얼마 가지 못해서 잘못 왔구나 이건 아니구나 싶었겠지만 이미 늦었는지 아예 빠른 저쪽 두럭으로 올라가 걸을 생각을 하고 계신 듯하다. 한참을 논둑으로 걸어오다가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고..... 엄마는 자꾸 멀어지니 아니다 싶었는지 저 험난한 길을 가로질러 어렵게 어렵게 제 길 찾아 오더라고. 그래 네가 뭘 좀 아는구나. 돌아가기엔 너무 멀고,..

흐린 겨울...

흐린 겨울 하늘이면 기다려지는 것이 있지만 오늘도 날은 하늘은 흐리고 기대만 잔뜩 하게 했지만 단 한송이의 안개꽃 같은 눈송이를 허락하지 않았지. 하긴 어제 아침엔 생각지도 않았는데 눈이 흩날려 있더라고, 차 안에는 제법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도 될 만치 살포시 내려앉기는 했지만 그것을 첫눈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지 날 집에만 있던 막둥이가 잠깐 나갔다 온다고 나가더니 일찍 들어왔다 예쁜 크리스마스 빛 케이크와 꽃 한다 발을 들고~ 참 예쁜 아이 같다. 말을 많이 들은 것도 아니고, 궁금하기도 하고, 묻고 싶은 것도 좀 있기는 하지만 많이 묻지 않는다. 그냥 지금은 저희들끼리 좋으면 좋은 거지 싶으니까.. 2년 넘게 만나고 있는데 그냥 느낌이 참 괜찮은 아이 같아서 오래 잘 지냈으면 하는 생각이 든..

오후 다섯시 십육분

크리스마스 저녁 다섯시 십육분 횡하게 느껴질 정도로 도로는 한산하다 회 포장해 가려고 들어간 남편 차안에서 강아지 끌어안고 바라다 본 육차선 도로는 텅 비어 있고 포장전문 횟집 안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흥청이고 망청이던 연말의 세상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며 시큰둥 했던 내게도 낯설은 이 풍경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데, 가게 안으로는 사람들이 자꾸 들어간다 조금 일찍 나올껄 하는 성각을 하는데 남편이 왔다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따듯하게 채워져 갔다. 별일없이 따듯하게...

작은아이가

작은 아이의 인 서울은 이미 확정 되어 있었다. 그래서 별 욕심 없었다. 아니 여기까지도 충분하다고 혼자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이 그렇다고 해도 아들이나 우리집 남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겠지. 산책을 마치고 거실에 도착한 시간은 우후 4시 58분.. 발표 났나? 남편이 물었다. 아직요. 2분 남았어요. 했다. 주방에 가서 국수 간식하나 챙겨 주고, 구워 놓은 고구마 남편이랑 껍질 벗기고 있는데 작은넘이 뭐라 한다. 어? 엄마 됐다고~ 진짜! 빠른 걸음으로 작은넘에게 가보니 테블릿 모니터에 뜬 최종 합격을 축하합니다 라는 메세지를 보여준다. 이 학교에 진짜루? 남편도 좋아라 한다. 더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딱 거기까지다. 그렇게 우리집에 막둥이 내 아들이 인 서울에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우리집 강아지는...

엄마랑 허리 묶고 기차놀이하듯 따라다니다가 출근하려는 형아가 씻으러 마악 들어가니 욕실 문 앞으로 가서 얌전히 앉아 나를 바라본다. 왜? 뭐?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더니 박박 왼쪽 앞 발로 욕실 문을 박박 긁는다. 방금 형아 들어갔잖아. 했더니 나 화장실 급하거든 하면서 더 쎄개 긁어대며 나를 바라본다. 안 돼 형아 화장실 갔잖아. 해도 소용없다. 어쩔 수 없이 안고 마당에 나가 몇 바퀴 돌고 들어 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 국수가 배변 패드를 멀리하고 화장실에서 배변을 하기 시작했고, 어쩌다 화장실 문이 닫혀 있으면 긁어 대거나 긁어대는 소리를 아무도 못 들으면 끼이잉 끼이잉... 하며 우는 소리를 한다. 나 급해~ 하듯이.. 그럼 문 열어 주면 졸래졸래 들어가다 뒤돌아 보며 나 잘하지? 하듯 ..

생강차 한잔

한나절 일을 끝내고 들어와 들어와 점심을 먹는데 좀 그랬다. 설거지를 하고 나오니 목소리가 갈라졌다. 뭔?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젤 먼저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리고 속이 좀 답답했어. 그래도 국수 데리고 산책도 가고... 에어 프라이기에 수육도 해 먹어 보자 했으니 해야 하고, 마트도 다녀왔다. 이것저것 왜 그렇게 살 것이 많은지.. 설탕 1kg , 콩나물 한 봉지, 키친타월, 주방세제, 갈치 한팩 간고등어 한 손 등등 등등..... 계산대에 올려진 것들이 찍어 내놓은 금액은 십육만 원이 넘었다. 다시 정육점에 들어가 목살로 세근 사고~ 집에 오니 다섯 시 반.. 손 씻고, 목살 허브솔트 뿌려 간부터 해 놓고, 압력솥에 쌀 씻어 가스에 올리고, 묵은지에 마지막 남은 감자 몇 개 깎아 넣고 낼 아침 먹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