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리던 스산함을 안고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물병이 잉크 번지듯 먹구름이 채워져 가는 하늘을 보며
벌써 비가 내린다고? 낮에나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못 믿어운 눈빛을 보내며 아침 산책길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마악 골목을 들어서는 우리 머리 위로 우우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비에 젖음 그거와는 상관없이
젖어드는 멍뭉이는 아닌 것 같아서 안고 뛰는데 우와..
이것이 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비는 더 신이나서 내 머리 위로 쏟아지고
멍뭉이는 한껏 고개를 파묻고 엄마 더 빨리 더 빨리~를
재촉하는 듯 하다.
비 내릴 때는 물론 비와 함께 걷는 것도 너무 좋지만 이렇게
처마 아래 여유로이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비의 느낌에 젖어드는 것도
너무 좋다..
ㅎ...
나이가 적지 않다는 뜻이겠지.
어렸을 때는 우산 하나면 충분했는데 비가 내리는 거리라면
어디든 얼마큼이든 좋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관람모드다..
비 묻은 바람..
빗소리..
비에 젖은 세상..
그리고 비에 젖어드는 나의 상념..
그거면 충분한 것이다.
더 아름답고
더 낯설고
더 푸르르고 더 스산한 풍경이
내 앞에 펼쳐져 있지 않아도 충분히 나는 이미
비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비가 내린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비가
잠깐 내리다 말 것이 아니라는 듯..
오늘은 하루종일 내리겠다는 듯이 그렇게 내리고 있다.
비 맞이를 위해 마당에 내려앉은 화분들이 더 싱그럽게 느껴진다.
저 아이들도.. 비를.. 달라진 바람을..
계절을.. 하늘을..
얼마나 바라고 또 바랐겠는가
습관처럼
컵에 얼음을 담아 라테를 만들어 왔는데 차갑다.
오늘은 충분히 따듯한 커피도 맛있을 것 같다.
아........... 가을이다. 이제 가을인 것이다.
따듯한 커피가 맛있어야 가을.. 그렇잖아.
그 따듯한 커피의 계절 앞에 앉아
청소도 안 하고, 젖은 머리도 씻어내지 않고 주저리 주절 거리고 있는 나는
확실히 비를 좋아한다.
비가 내리면..
가을이 함께 다가오면...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감성들이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마구 흘러넘친다.
정리하는 법을..
내 마음을 털어내는 법을 좀 배워야 하는데..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이렇게
무질서하게 쏟아내지만
그 속에서 나는 가벼워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비가 내린다.
커피는 자꾸 차가워지고..
어느새 카디건 하나 걸친 몸이 딱 적당히 좋다 한다.
어제만 해도..
더워 더워했었는데..
날씨가 미쳤어. 미쳤어.. 했었는데 말이다.
큰아이는 출근하는데 힘들지는 않았을까?
비가 뭉터기로 쏟아지지는 않았으니까...
작은아이는 셔틀버스 타고 출근하느라 오늘은 조금 더 일찍
움직였을 것이다.
엄마는..
아마도... 우산 받혀 들고 어린 배추 모종을..
마악 싹이 돋아 비실 거리는 무 새싹들을 보고 계시지는 않을까
예상해 본다.
시시티브이 한 번 들여다봐야지..
요란하지 않게 비가 내린다.
곱게도 내린다.
마당 작은 웅덩이에 그려지는 수없이 많은 동그라미들이
늦더위에 지친 마당을 다독이고
갈색으로 타 들어간 황철축 잎사귀를 위로하고
일찌감치 패점 휴업 상태인 텃밭에 고추나무들을 끌어 앉는다.
이 비가 좋다.
이렇게 진득하게 늦은 더위를 달래어 보내고
자리 잡지 못하는 가을을 눌러 앉히겠지.
오늘은 왠지 하루종일 멜랑꼴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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