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날들/괜찮은 오늘 2024

한 번쯤은..

그냥. . 2024. 10. 19. 12:55

가을비가 오락가락한다
아침에 내린 커피는 여전히 잔을 채우고 있지만
하나 넣은 얼음이 사라진 것처럼
향도 사라지고
오로지  씁쓸함만 남았다.
그래도 커피라고 앞에 놓고 앉았는데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우선은 집안에 우유가 동이 난 까닭이고 달달한 설탕커피는 선호하지
않는 데다가 오늘처럼 이유 없이 커피가 맛없는 날이 있다.
커피.. 그렇게도 환장하게 마셔대던 커피가 오늘처럼 맛없는 날..
내가 이십 여년 전에 그저 살기 위해서 먹어대던 서너봉지믹스커피를
나의 아저씨에서 여주인공이 똑같은 방법으로 마시고 있더라고..
물 가득에 믹스커피 서너 봉지...
그게 밥이고 그게 술이고 그게 안정제이고 
나를 독이고 그게 피난처이고 그게 비명이고 그랬다.
내가 가장 밑바닥에서 힘들 때 마셔대던 커피죽.. 내지는 커피 미음..
아... 오랜만에 믹스커피가 마시고 싶어 지네..
..........
믹스커피 한봉지에 머그컵 가득 채워 왔다.
그래 이 향 이 맛 이 따듯함이지..
원두커피하고는 또 다른 푸근한 따듯함이 있다.
위가 망가지고 장이 탈이 나고 귀가 문제가 생기고
여기저기가 삐거덕 거리기 시작하면서 멀리 해야 하는 것들이
생겼다.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오직 커피..
그걸 멀리하라는 말이 참 야속하게도 들렸었는데...
그랬다.
커피는 내 유일한 안정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망가져라 망가져라 하면서 마시는 술처럼
망가져라 하면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내가 좀 망가지면 나를 좀 봐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비명같은 기대감에서..
그렇지만 누구도 나를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도 내가 아파 쓰러지기 전까지는 모르셨겠지.
그저 마음만 태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딸 가진 죄인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세대에 딸 가진 죄인?이라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누군가 뭘 얼마나 힘들게 살아서 날마다 징징 거리느냐고 
묻은다면 사실 할 말은 별로 없다.
사는 게 만만한 사람은 없겠지.
생활고에 미친 듯이 세상에 뒹굴리며 살아 낸 것도 아니고
가정폭력으로 온몸에 피멍이 들면서 살아 낸 것도 아니고
바람개비처럼 여기저기 바람을 일으키는 나도 남편도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그게 뭐.. 그게 뭐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어찌 보면..
목 위로만 현재에 있고
그 밑으로는 과거의 늪에 묶인 채 헤어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늘어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그때 의도치 않은 어떤 자리에서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내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있지만
그렇게 내놓았던 이야기들은 그냥 말 그대로
험담이고 뒷담화이고 추억팔이였던 것 같다.
후련하거나 위로받는다거나 이해받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그저 니가 더 힘들었네 내가 더 힘들었네...
내지는 그래...그랬구나 공감을 주고 받는 정도..
지난해 봄 엄마랑 살면서 몇 번 꺼냈던 내 이야기는
엄마의 가슴만 아프게 했을 뿐...
이제야 이야기할 수 있네라는 내 마음, 그리고는 
아파하는 엄마의 마음만 보였었다.
단 한 번도 작정하고 풀어보겠다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서라도 벗어나고 싶다거나
이제 그만 놓고 싶다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늘 불안했다.
과거에는 내 세상이 불안했다면
지금에는 내 건강이 불안하다.
차라리 화악 아프고 말면 좋겠다는 생각..
그런데 이건 불편한데 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데 사는 데는 불편한.. 그랬다.
세상이 흔들리는 것도 먹을 때마다 그 뒤를 걱정해야 하는 것도
또 다른 문제들도..
관리가 필요하지만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 듯한..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그런 것들 때문에 그냥 늘 그러니까 하고 살았다.
그러다 모임에서 관광을 갔던 날 내 흔들리는 세상을
여러사람에게 확인 시켜주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가볍게 여기지 않은 남편의 권유로 한의원에 갔었다.
4년 전쯤 제법 도움을 받은...
한의사 선생님께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는데 
진맥도 안 잡아 보시고는..
양방으로 도움을 받아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정신건강의학과를 추천해 주셨다.
침과 한약을 써도 좋겠지만 침을 맞기에는 체력이... 하셨고..
무슨 침인가... 머리에 맞는 게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내가 좀 꺼려지기도 했다.
한의원에서 나오면서 검색해서 찾아간 정신건강의학과..
이래저래 해서 찾아왔다 했더니..
몇 가지 검사도 하고 이래저래 말씀도 하시더니 
이러쿵저러쿵 예를 들어주시는데 보편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려웠다.
어렵네요.. 했더니..
말씀을 하시면서..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셔야 하는데..
일주일 전이든 한 달 전이든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서
뭔가를 풀어놓아야 하는데 그게 처음이고 낯선 곳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쉽지는 않으시겠지요... 하셨었다.
그리고는..
아마도 가지고 계신 많은 불편한 부분들이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습니다.
다른 정밀 검사를 해도 원인이 없어서 오신 거잖아요.
그럼 이제 시작이니 약의 도움을 받아 보면서.....
어쩌고 저쩌고 하시면서 처방전은 내어 주셨다.
그렇게 받아온 약 한 끼를 먹고 난 넉다운이 되었고. ㅎ..
이거 먹어야 해? 
요즘 스트레스 그렇게 많지 않은데 꼭 병원을 다녀야 해? 
싶어졌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일주일 전 한달 전 에피소드랄 게 
별로 없어 다 오년 전 십년 전 이십년 전 일이지 싶은...
운동 열심히 하고 사람들하고 어울 어져 이제야
남들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싶은..
그러다가 언니랑 통화를 하면서 
한 번 발을 내딛었으니..
지금 아니면 다시는 갈 일 없을 것 아니냐며..
상담받으면서 속에 있는 것 다 꺼내 보여 보라는..
뭐 굳이.. 했는데도
언니는 그렇게 해 봤으면 좋겠다 했다.
언니가 지인이랑 오래전에 점 보러 한 번 갔었는데
지인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는데
언니는 기본적인 정보 이외의 말을 아끼니 그분이 그랬단다.
도움을 받고 싶어서 왔으면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청해야지 얼마나 맞추나 보자 하고 있다고..
힘들면 손을 내밀라고 했다며..
근데 그때는 언니도 그냥 나왔다며 
다시 갈 일 없는 곳에 어쨌건 한 번 길을 텄으니
아니야 하지 말고 도움을 받아 보라고..
그것이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 
정리한다 마음먹어 보라고..
아는 사람 아닌
그냥 떠들어 대는 말이 아닌
들어줄 준비를 하고 있는 의사 선생님께 내어 놓아 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그때도 나는 사실 언니의 진심어린 말을 거절하기 미안해서 그럴까..
하기는 했지만 별 마음이 없었다.
오늘 혼자 점심을 먹으면서
멀리 거실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회색빛 담장과 흐릿한 공기 식어빠진 커피...
그래.. 필요할지도...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필요하겠다... 뭔가를 기대해서라기보다는
과거에 묻혀서 굳어가고 있는 내 사지육신이 
거기에 최대 가해자에서 최대 피해자가 되어가는
늙은 어머니가..
마음 한구석에 보였다.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그렇게.. 늘 아픈데 
아프네 또 아프구나...하고 그냥 그러나 부다 하고 사는게
맞는가 싶은..
이 이런 거...
기대 없이
그냥...
물 흐르듯 찾아갔으니
물 흐르듯 한 번 가 볼까... 싶다..
가다 아니면 그때 그만 두면 되는 거지 싶다.
그만두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까..
그때 한 번 해 볼걸.. 하는 미련은 이제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일주일 남은 예약날짜까지 내 마음은 또 어떻게 
뒤집어질지 나도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천천히 내 마음에 확신이 되는 이유가
불쑥 찾아 들길 기대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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